감독 : 김종관
출연 : 한지민, 남주혁 외
장르 : 드라마, 멜로
네이버평점 : 8.2 / 10
다음평점 : 2.8 / 5
왓챠피디아 : 2.7 / 5
레터박스 : 3.2 / 5 (후하다 후해)
블로그에 스포를 쓰지 않으려고 하는 편이지만 해당 글은 강력한 스포들이 존재합니다.
굉장히 좋아하는 영화가 있다.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영화를 꼽으라고 하면 열 손가락안에 들어갈만한 영화다.
20대 초반 무렵, 이 영화가 줬던 울림이 너무나도 컸던 탓에 지금까지도 그렇다.
영화가 개봉한지 20여년이 지난 지금 무렵에
[이 영화가 그 정도로 대단한가?] 라고 묻는다면
면면히 들여다보면 아쉽게 느껴질수도있다.
하지만 20대의 나한테는 여실히 그렇다.
그리고 그 20대를 지나온 나에겐 여전히 그런 영화다.
그리고 몇 년 전 이 영화를 국내에서 리메이크하여 개봉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저 그런, 그럴 수 밖에 없을거라 느껴지는 리메이크는 보지 않지만,
최근에 들어서 그 놈의 넷플릭스 덕에 보게 되었다.
그리고 분노하게 되었다.
이 영화는 원작에 대한 이해와 존중이 결여된 졸작이다.
'조제'
그 캐릭터가 주는 임팩트가 너무나 강렬한 탓에
그녀의 짝(한 순간일수도 영원일수도 있는)츠네오라는 인물에게의 감정이입은
원작 소설도, 영화도, 만화를 보았을 때도 언제나
먹먹하고도 아프게 다가왔다.
유일하게 국내판 영화가 주는 느낌만이 다르다.
우선 원작 소설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이야기의 근간이자 모든것의 시작이다.
'다나베 세이코'라는 원작가의 단편소설집 '조제와 호랑이와 물고기들'에 수록된 이야기로
단편집 안에 여러편의 연애소설이 있지만 그 중 소설집의 제목을 차지하고 두번째로 수록된 작품,
'조제와 호랑이와 물고기들'이 이 이야기의 시발점이 되었다.
그것을 '이누도 잇신' 감독이 영화화 하고 국내 개봉한 제목이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이다.
소설의 내용은 어떨까.
츠네오와 조제의 만남. 그리고 그 사랑 이야기.
조제의 성격과 그 성격을 가지게 된 이유들. 그리고 주인공(츠네오)이 그것을 대하는 관점.
거기까지만 적혀져있다.
영화와는 꽤 다르다.
원작을 보고 영화를 본다면 영화는 살을 꽤 많이 붙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누도 잇신' 감독은 단편적인 소설의 이미지들을
조금 더 구체적인 캐릭터와 사건들, 소재들, 이야기들로 엮어서 풀어나갔다.
그리고 이별까지 넣었다.
소설에서는, 이별에 대한 이야기를 막연하게 '그렇지 않을까' 라고만 적었고
영화처럼 구체적으로 만들어내지 않았다.
영화에서의 이별은 감독의 개인적인 관점(이렇게 되지 않았을까)이 삽입되어 있지만
그것을 풀어내는 방법이 굉장히 좋았기 때문에 이 영화는 지금까지 회자되고 있는 것이다.
만화에서는 둘의 이별에 대한 이야기가 없다.
오히려 둘의 지속된 만남을 그리고 있다.
순정만화라는 장르의 특성상 둘의 이야기가
이별이 아닌 지속적인 만남으로 마무리 짓는것이
좀 더 좋은 선택이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완전히 색다른 이야기를 만들어 내면서 잘 리메이크해놨다.
국내영화는 원작영화와 똑같이 이별의 마무리를 선택했다.
하지만 '왜?'가 존재하질 않는다.
애초에 왜? 둘은 사랑하기로 했는지에 대한 설득력이 없다.
갑자기 키스하고
갑자기 자고
갑자기 너가 떠나면 장애인을 범한 놈이라며 신고하겠다고 한다(...)
그리고 왜? 헤어졌는지가 없다.
수족관을 가고
운다.
그리고 둘의 사이는 끝났다.
아니 왜?
서사의 전개에서 왜?는 굉장히 중요하다.
둘의 만남이 어떻게 전개되었는지.
둘의 헤어짐은 어떤 이유로 일어날 수 밖에 없었는지.
그 서사를 관객들에게 개연성있게 설득시켜야 한다.
그 모든 것을 빼고(국내판은 정말이지 아무것도 전개시킨 이야기가 없다)
그냥 둘은 만나게 되었고 시간이 지나고 나니 헤어지게 되었다로 끝나버린다.
서사가 전개됨에 관객을 설득시킬 생각이 없는것이다.
(원작 영화의 감정적 빌드업과 러브호텔에서의 대화들,
담백하게 헤어짐을 설명하며 슬픔을 증폭시키는 연출과는 대비된다.
아니, 그냥 아예 연출이 없다.)
이 영화에 화가 나는 이유는
주요 주변 캐릭터를 잘 못 만든 이유도 크고
그 캐릭터들을 제대로 작용시키지 못하고 소비시켜버린 이유도 크며
서사를 진행시킬 생각도 없는 탓도 있고(애초에 그럴 능력이 없다)
무엇보다 장애인을 바라보는 감독의 수준 낮은 시선이 크다.
영화를 구성함에 있어
단 한 구석이라도, 일말의 가능성이라도
제대로 만들고자 한 부분이 전혀 없어 보인다.
영화는 총체적난국이라 어디서부터 짚어야할지 힘이 든다.
첫번째로 감독의 장애인을 대하는 태도에 대해서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다.
그냥 나자빠져 있는 존재와
그것을 도와주어야하는 사람의 관계를 보여주는것으로 시작하는 이 이야기에서
장애인의 삶을 비참하게 그리고 싶어서 안달이 난 감독의 태도를 볼 수가 있다.
이 부분은 영화에서 지독하고도 집요하게, 그리고 지겹게 나온다.
영화를 보기 시작하는 나는ㅡ정말 어처구니없게도 5분만에 의문을 가질 수 밖에 없었다.
지나치게 수동적이고 방어적이며 소심하고 보잘 것 없는 조제를 보며
이게 내가 알고 있는 조제라는 캐릭터가 과연 맞는 것인가라는 의문이다.
물론 캐릭터의 새로운 해석, 새로운 설계는 감독의 몫이다.
하지만 그 결과물이 너무나 저열하다.
감독의 1차원적인 장애인을 대하는 시각과 일맥상통하기 때문이라 본다.
감독이 바라보는 '휠체어를 탄 인물'에 대한 생각이 투영된 '비참한 캐릭터'가 국내판 조제다.
감독이 생각하는 장애인은 이래야만 하는 것이다.
당돌하고 귀여우면서 그 발랄함 속에 애처로움, 꿈과 미래와 불안함이 공존하는
입체적인 캐릭터는 감독이 생각하는 장애인이 아닌것이다.
이 부분은 원작에서도 한편으로는 씁슬하게 다가오는 것이(별로라는 뜻이다)
지나치게 '민폐'를 생각하는 일본인의 습성과
'고장난 존재'라고 생각하는 조제가 밖을 다니는것이 부끄럽기 때문에,
산책을 하고 싶어하는 조제를 이른 새벽시간에만 데리고 나가는
할머니라는 캐릭터의 존재이다.
또 장애인에 대한 공격적인 사회를 두려워하는 할머니의 태도도 있다.
실제로 영화상에서 조제가 언덕길을 미끄러져 부딪히게 된 것도
누군가의 '공격'때문이다. (만화에서도 그렇고 국내영화에서도 그렇다.)
하지만 이 캐릭터의 존재는 감독이 장애인을 대하는 태도의
수준 낮음을 보게 되는 것이 아닌 스토리의 자연스러운 맥락이자 장치이다.
유모차를 타고 다니는 조제는 누군가가 이끌어줘야 산책을 하는
조제의 삐딱한 성격과 그것을 제한적이나마 이끌어주고자 하는 할머니와의 관계,
그리고 자연스럽게 츠네오가 그 이끌어줌을 수행함으로서 연결되는 맥락과
장애인에 대한 씁쓸한 사고방식을 가지는 할머니가 부재했을 때
영화의 전반부에서 후반부로 넘어가는 중요한 장치이기에 존재하는 것이다.
국내판엔 그딴 것 없다.
처음 조제가 만들어주는 식사도 굉장히 느낌이 다르다.
캐릭터가 다름의 탓도 있겠지만
소박한 식탁을 대접받은 츠네오가 의외로 맛있어하며 먹는 장면과 대비해서
왠 괴상한 번데기탕을 내주는 식탁을 받아 똥씹은 표정으로 먹는 영석.
왜인지 모르겟지만 벌레가 지나가는 집안. (왜 이딴식으로 표현한걸까)
같이 동석하여 식사하지 않고 이상하게 쳐다보는 할머니. (저 놈은 왜 밥을 축내지 하는 표정)
모든 장면이 너무나 이상하게 다가와서 미칠것만 같았다.
당연하게도 이것 역시
장애인 집안에서 평범하게 식사하는 것을 허락치 않는
빈약한 감독의 사고방식을 엿볼수가 있다.
그 처참한 머릿속에 구역질이 날 지경이다.
이후에 나온 장면이지만 왜 햄을 굳이 다리미에 굽는 것일까.
멀쩡히 가스가 나오고 프라이팬도 있을법한 집인데.
원작에서 츠네오가 조제의 집에서 처음 밥을 먹게 되고
이후로도 계속해서 밥을 해달라고 찾아오는 것은 그 의미를 가지는게
본가를 나와 자취를 하면서 멀어지게 된 집밥과
그것을 충족시켜주는 조제의 집이 주는 따스함과 관련이 있다.
파트너와 관계를 가지고 인스턴트 파스타를 먹는 장면과는 대비되는 장면이다.
그런데 국내영화는 그딴건 모르겠고
번데기탕과 혐오스러운 벌레를 등장시킴으로써 의미를 완전히 퇴색시켜버렸다.
(물론 어떤이에게 번데기탕은 훌륭한 음식일 수 있다. 하지만 영화는 그렇게 표현하지 않았다.)
아마 그 의미가 퇴색됨도 인식하지 못했을 것이다.
아무 생각없이 만들었을테니까.
집에 온 손님에게 평범하게 식사를 대접하고
한 구석에 앉아 책을 읽으며 천진한 대화를 하는 조제는 온데간데 없고
"독이라도 타놓은줄 아냐"고 빈정대는 정신나간 여자만 남아버렸다.
영화가 시작된지 10여분밖에 지나지 않았지만
이 미친 영화를 틀기 시작한 나를 저주할 수 밖에 없는 대사였다.
(정신나간 대사는 여럿 더 등장하지만 언급하기조차 역겨울 정도다)
두번째 문제점은 쓸모없는 캐릭터들의 나열이다.
원작에서 나름 중요한 조연으로 나오는 '카나에(우에노 주리)'와 비슷한 캐릭터 '수경(이소희)'이 있긴 하다.
카나에는 츠네오와 관계를 쌓아가지만 츠네오는 조제로 인해 카나에를 놓게 된다.
그리고 조제에게 카나에는 '당신이 가진 무기가 부러워' 라며 따지고
'그럼 너도 다리를 자르던지'라는 냉소적인 명대사가 탄생하게 되었다.
국내판의 수경은 그냥 없어도 되는 캐릭터다. (집 수리를 하게 되는 최소한의 작용은 한다.)
그리고 한국판에서만 등장하는 '혜선(박예진)'과 '최경(이성욱)'
부적절한 관계의 상대로 나오는 여교수의 역할은 대체 무얼까.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가 없다.
역시 없어도 되는 캐릭터다.
위스키에 대한 지식을 뽐내고 싶었던 감독은
조제가 스코틀랜드를 가고 싶어하며 빈 위스키병을 모으고
최경이라는 캐릭터를 등장시켜서 '고급커피와 위스키의 바디감 어쩌구~' 하며
그 소재를 사용하고자 했다.
사용을 하기는 했는데 이야기에 아무런 작용을 하지 않는다.
진짜로 그냥 감독 본인이 나 위스키 이만큼 안다고 자랑하고 싶었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
역시나 없어도 되는 캐릭터다.
원작과 동일하게 등장하는 조제가 시설에 있던 시절 친구 '철호aka점봉이(조복래)'
엄마를 찾으며 우는 시설아이들을 때리는 '코지'가 엄마라는 단어에 반응하여 화를 내는건 결국
본인 스스로 엄마에 대한 결여가 가득하기 때문이다.
그런 코지에게 조제는 본인이 엄마가 되어주고자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회상장면을 넣음으로 관객들에게 설명과 설득을 하고자 했다.
국내판은 그것도 대충 말로 때우고 넘어가면서 의미를 퇴색시켰다.
이것도 능력인가 싶다.
결국 원작에서도 존재가 약했던 캐릭터를 완전 죽여놓음으로써 없어도 되는 캐릭터를 만들어냈다.
이럴거면 그냥 들어내는게 낫지 않을까 싶다.
이 캐릭터들은 이 영화에서 어떻게 작용할까?
놀랍게도 아무런 작용을 하지 않는다.
진짜다.
나름의 작용을 하는 '척' 하지만 정말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는 캐릭터다.
그리고 나는 확신했다.
이 감독은 영화를 만들면 안되는 사람이다.
나아가서 이야기를 창작하면 안되는 사람이다.
캐릭터에 대한 이해와
장면과 장면간의 이어짐.
인물간의 관계와 그 묘사.
이야기를 이끌어감에 있어 작용하는 각각의 기능에 대해서 제대로 고민해본 적이 없는 사람이다.
이것을 쓸데없이 캐릭터를 소비한다고 한다.
이 캐릭터들은 소비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하고자 하는 말이 없는데 메신저가 등장한다고 무엇을 할 것인가?
초등학생 습작 수준에서도 발견하기 힘든 빈틈을 과감하게 영화에 처박아 넣은
감독에게 감탄을 하고 말았다.
그리고 가장 어이없는건 할머니라는 캐릭터까지 죽여놓았다는 것이다. (캐릭터 연쇄살인마)
국내판에서 할머니는 친할머니조차 아닌듯 묘사해놨다.
그건 그럴수도 있다 치지만 할머니의 죽음은 이 영화가 1막에서 2막으로 넘어가는 중요한 기로이다.
조제와의 만남을 할머니가 막고 할머니는 조제를 세상과 격리시키려고 한다.
츠네오는 할머니때문에 이제 더 이상 조제를 만날 수 없음에 괴로워한다.
그리고 혼자 남게 된 조제에게 달려가면서 둘의 새로운 관계가 시작되는 것이다.
국내판에서 할머니는 역할이 없다.
이야기에 아무런 작용도 하지 않고 영석을 밀어내는건 조제 본인이기 때문에
영석은 왜 괴로워하는지 설득력도 없고, 괴로워하기는 했나? 싶다.
(애초에 그 전까지 조제와 내면적 친밀감을 쌓아가는 빌드업이 너무나 약해서)
할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에 찾아가게 되는 이유도 알 수 없게 되버렸다.
가버리라고 하면서 동시에 가지말라고 외치는 원작 조제의 절규와 달리
어떻게 그렇게 쏜살같이 나왔는지 알 수 없게 뒤따라나온 조제에게 뜬금없는 키스를 갈기며
둘의 사랑이 시작되었다고 하는데 내가 놓친 장면이 있는건가 헷갈릴 지경이었다.
세번째로는 호랑이와 물고기가 사라졌다는 점이다.
제목에서도 빼버렸다.
이 영화와 원작 소설에서 호랑이와 물고기가 갖는 의미에 대해 모르기 때문에
그냥 빼버린게 아닐까.
혹은 상징적의미를 표현하는 방법을 모르는걸까.
그런데 또 왠지 중요한건 아닐까 생각했는지 어설프게나마 넣어놓기는 했다.
호랑이는 조제가 마주해야만 하는 세상이다.
세상은 크고 거대하며 날카롭고 무섭다.
그것을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면 같이 마주하고 싶었던 조제의 바램이 드러나는 중요한 소재다.
조제는 자신의 의지로 호랑이를 보러갔다.
세상을 스스로 마주하려는 의지가 엿보이는 장면이다.
한국판에서는 그냥 헛것을 보는 정신나간 여자로 만들어놨다. (진심으로 웃었다.)
물고기는 죽음의 세계에 사는 존재다.
이별 이후에 맞이하게 될 세계이면서 함께 지내는 세계이기도 하고 그 세계에 살게 될 조제 그 자체다.
원작소설에서의 묘사는 '완전무결한 행복은 죽음 그 자체'라고 서술해놓았다.
원작 영화는 조금 다르게 츠네오와 가장 야한 섹스를 하기 위해 그 죽음의 세계에서 나오게 되었고,
곧 길 잃은 조개껍데기처럼 살게 될 자신도 외롭지 않고 괜찮다고 하였다.
언젠가 너가 사라지고 나면
나는 길 잃은 조개껍데기처럼 혼자 깊은 바다 밑에서
데굴데굴 계속 굴러다니게 되겠지.
그런데 말이야 그것도 나쁘지 않아.
한국판에서는 그냥 수족관에서 질질 짜는 영석의 모습만 남았다.
적어도 이 영화에서는 이별을 이렇게 촌스러운 억지눈물 연출로 신파스럽게 그리면 안된다.
원작 영화에서도 울기는 하지만 조제 앞에서는 울지 않았다.
그 앞에선 최대한 담담하고 담백해야한다.
그래야만 앞으로 살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서로가 그 정도로 큰 존재이기에 앞에서는 울지 못한다.
츠네오가 운 까닭은 헤어지도 친구로도 도저히 될 수 없는 사람에게서 도망친 자기 자신 때문일 것이다.
생각보다 담백한 이별이었다.
이유야 여러가지 있었겠지만
사실 단 하나뿐이었다.
내가 도망친거다.
도망칠 수 밖에 없는 츠네오와 그 담백한 이별때문에 영화를 보는 관객은 눈물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어디서 꼬셔왔는지 음악감독과 촬영감독은 굉장히 훌륭하다고 생각한다.
영화의 분위기와 굉장히 잘 어울리는 서정적인 음악은 굉장히 좋았다.
그리고 빛바랜 색감, 어두우면서 빛과 대비대는 그림을 뽑아낸 화면 자체는 훌륭했다.
영화를 새로 만들며 원작의 이야기를 굳이 고수할 필요는 없다.
오히려 원작을 너무 따라가면 복사 붙여넣기밖에 안되니,
새로운 숨결을 불어넣고자 하는 영화인은
새로운 캐릭터와 서사를 만들어내고자함이 당연한 선택이라 생각한다.
실제로 많은 리메이크 작품에서 이 부분을 가장 깊게 고민한 흔적이 보인다.
하지만 이 결과물은 처참하기 그지없다.
누군가는 나에게 원작충이라고 욕할지 모른다.
원작부심 부리지 말라고 할지도 모른다.
나는 당연하게도 원작과 똑같은 결과물을 바라지 않았고
새롭게 그렸을 세계관을 볼 기대하며 영화를 재생시켰다.
의미없는 대사와 캐릭터들.
전혀 이어지지 않는 감정선과 장면들...
결과는 정말 별로였다.
덕분에 원작 영화와 소설, 만화책과 애니까지 심도깊게 다시 보는 계기를 만들어준 부분은 고맙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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