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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평작 1.5~3.5

[영화]조커:폴리 아 되ㅣ뮤지컬 영화 처돌이가 본 감상

by 부엌시니 2024. 10.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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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커:폴리 아 되,2024
조커:폴리 아 되, 2024

감독 : 토드 필립스
출연 : 호아킨 피닉스, 레이디 가가 외
장르 : 뮤지컬, 범죄, 법정드라마
 
네이버평점 : 6.07 / 10
다음평점 : 3.2 / 5
왓챠피디아 : 3.2 / 5
레터박스 : 2.5 / 5 (짜다 짜..)


뮤지컬

2024년 하반기는 '조커:폴리 아 되'가 영화계를 수 놓을 것이라고 예상했다.
이 영화는 어떤 의미로든 관객들에게 충격을 안겨준 작품이 되었으니,
조커라는 캐릭터의 충격적이고 기괴한 행보와 영화의 궤가 같이 가는 형국이다.

나는 뮤지컬 영화를 좋아한다.
폭 넓게 보면 음악을 다루는 영화를 좋아한다.
뜬금없이 노래와 춤을 남발하는 발리우드도 좋아한다.
영화는 시각효과와 청각효과가 가장 크게 관여한다.
무성영화 시절 누리지 못했을 소리의 기쁨을
현재 관객들은 마음껏 누리고 있으며 영화의 O.S.T는 그렇게 발전에 발전을 거듭하였고,
뮤지컬 영화는 영화의 한 부분적인 이미지나 극적인 장면을 위한 배경음악이 아니라
음악 그 자체가 영화요. 영화 그 자체가 음악이 되니 이건 내 취향을 아주 잘 만족시킨다.

'노킹 온 헤븐스 도어' 처럼 영화의 엔딩을 위한 음악,
천국의 문을 노크하는 듯한 장면을 위한 음악이 있는가 하면
'레미제라블'처럼 모든 대사에 운율을 넣고 스토리 진행과
모든 감정표현마저 음악으로 이끌어가는 영화가 있다.
후자는 뮤지컬 영화이기에 당연한 결과이며,
레미제라블에서 음악이 흘러나오고 음악으로 장면을 이끌며
대사를 하는 것을 불필요하다고 느끼는 사람은 거의 없다.

사람들은 묻는다.
'조커:폴리 아 되'는 왜? 무엇때문에? 뮤지컬 영화여야하는가 라고.
그리고 나는 생각한다.
어째서 그러면 안되는것인지.

조커:폴리 아 되, 2024
조커:폴리 아 되, 2024

조커

사람들은 어째서인지 모르겠지만 조커라는 캐릭터와 그 이미지를
머릿속에서 이미 규정지어버렸다.
아마도 현재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가장 많이 하고
발언하는 이들의 90%는 '히스 레저의 조커'를 떠올리고
조커라는 캐릭터를 그것에 끼워맞추고 있을것이다.

하지만 그 어떤 캐릭터도 규정지어질 수 없으며
다루는 사람에 따라서 다채롭게 변화하는것이 캐릭터다.
그러면 안 되는 경우도 있다.
그리고 사람들은 조커는 그러면 안되는 경우라고 생각한다.

조커라는 캐릭터는 이미 수 많은 코믹스와
'팀버튼의 배트맨' 속 조커,
'다크나이트'의 조커나
'수어사이드 스쿼드'의 조커처럼
다양하게 다루어진 캐릭터다 보니 캐릭터를 만드는 사람에 따라서
다양한 해석과 방향성을 가지게 된 캐릭터다.
즉, 조커라는 캐릭터를 완전무결하게 규정지어버린 사람들의 의견에 동의할 수가 없다.

문제는 그 캐릭터가 관객들에게 설득이 되는가이다.
설득이 잘 되었다면 앞으로 또 어떤 조커가 나와도 그 조커는 새로운 조커이며
조커의 수백,수천가지 측면 중 새로움을 발견함이 주는 기쁨이 더 클 것이다.
그리고 '토드 필립스' 감독은 이미 전작 조커에서 이 캐릭터에 대한 설득의 단계를 만들어놓았다.
관객들이 느끼는 괴리감은 감독이 만들어놓은 조커라는 캐릭터와
관객들의 머리속에서 규정지어놓은 조커가 이번작에서 멀어진 탓이 크다고 본다.

조커:폴리 아 되, 2024
조커:폴리 아 되, 2024

폴리 아 되

'폴리 아 되'는 둘 이상이 공유하는 정신병을 의미한다.
나아가 집단적 광기를 뜻한다.
사람들은 아서보다 조커에게 열광한다.
그가 미쳐가기를 바라며 각성하고 희대의 빌런으로 탈바꿈되기를 바란다.
조커가 되고 싶지 않은 아서에게 조커가 되라고 너는 조커라고 윽박지른다.
 
결국 조커가 되지 못한 아서는 결말을 맞이하고,
아서에게 결말을 안겨준 이는 영화상에서 잘 보이지 않지만
자신의 입을 찢음으로써 조커는 대중에게 전염되고 전파되는 광기의 상징이 된다.
 
말하자면 조커는 어디에나 있는 존재인것이다.
당신에게도 나에게도 있고 군중속에서도 발견된다.
반드시 아서가 조커가 될 필요가 없는데도,
이미 사람들의 머리속에서 규정지어진 조커라는 이미지는
완성된 형태로 아서에게 그 허물을 뒤집어 씌우려하는것이다.

조커:폴리 아 되, 2024
조커:폴리 아 되, 2024

정신병적 변주곡

나는 이 영화의 평을 낮게 하지 않는다.
이것은 영화의 메시지적인 측면에서도 그렇고
영화의 방향성, 캐릭터 메이킹, 연출, 연기 등의 모든 부분에서 그렇다.
관객을 설득시키지 못한 요소들이 나에겐
뮤지컬이라는 형태로 설득을 시켜버린것이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와서 왜 이 영화는 뮤지컬이어야만 했을까.
전작 '조커'는 망상장애에 관한 영화였다.
영화 속 장면마다 등장하는 시계가 같은 시각을 가리킨다는 이유로
마지막 상담장면에서 아서 플렉이 모두 망상하는 내용이었다고 해석을 하는 사람이 있을 정도다.
당신이 영화에서 보았던 것들은 모두 꿈이라는 결론을 내버린것인데 이 해석은 괜찮은가?
나는 확대해석이라고 생각하는 입장이지만 이 영화가 망상을 다룬다는것엔 확실히 동의한다.
(전작이 모두 망상이었다면 속편의 존재자체가 부정된다. 그리고 관객들이 열광하는 조커도 부정된다.)
전작은 현실과 망상의 경계를 불분명하게 함으로써
아서 플렉이라는 인간이 겪는 망상속에서 겪는 고통과
그 정신병적인 요소를 영화로 잘 표현해놨다.
영화 중간중간 부분적인 장면이 아닌
영화 전체가 망상이었다고 해석을 해도 감독의 의도가 잘 먹혀들었다고 느낀다.

그리고 속편은 정신분열ㅡ조현병 혹은 이중인격의 고통을 다룬다.
시도때도 없이 뇌를 헤집는 메시지들.
관객들이 그토록 듣기 싫어하는 노래들은 정신분열적 메시지들의 교향곡인셈이다.
아서 플렉의 머릿속은 제정신이 아니다.
조현병처럼 끝도 없이 누군가가 떠들고 괴롭힌다.
그것을 노래라는 형태로 표현해냈고 이는 마지막 장면에서
제발 내 머릿속을 헤집지 않게 노래 부르는것을 제지하고
말로 해달라고 하는 아서 플렉의 모습에서 잘 드러나보인다.
그런 면에서 속편은 전작과 정신병을 다루는 궤를 같이 한다.
조커라는 캐릭터 또한 그런 소재를 녹여내기에 더 없이 좋다.
감독은 아서 플렉이라는 캐릭터를 설명하기 위해 전작에 이어서
그가 미쳐가는 과정과 어떻게 미쳐있는지를 뮤지컬이라는 장르로 표현해냈고
나는 그 의도가 좋았다고 본다.

조커:폴리 아 되, 2024
조커:폴리 아 되, 2024

대척점과 연장선

이동진 평론가는 이 영화를 전작의 대척점에 있다고 표현했으나
대척점을 구체로 설명한다면 반드시 어딘가의 연장선에 있다.
 
전작과 이번작을 비교한다면 분명히 대치되는 부분이 있다.
전작에서 기껏 아서가 조커로 변모하는 과정을 그려놓고
이번작은 다시 조커에서 아서로 회귀하는 과정을 법정드라마와 뮤지컬로 연출했다.
이것은 한 인간의 이중적인 인간성이 동시에 존재하며,
그 대척점의 인격과 계속해서 싸우는 동시에 연장선에 있다는 것으로 설명된다.
 
결국 아서는 조커이며 조커는 아서이고,
어느 방향으로 가는지의 과정을 완전히 다른 결론과 다른 연출로 설명하려는 것이다.
 
재판을 마치 TV쇼처럼 보는 군중과
이것을 영화로 보는 관객들에게도
대척점의 광기가 존재하고 그것은 우리 내면의 연장선에서 발견된다.

조커:폴리 아 되, 2024
조커:폴리 아 되, 2024

아쉬움

정리하자면,
이번 작은 집단적 광기를 아서에게 조커를 투영시킴으로써
군중들이 단체로 발작하는 형태로 드러나며
정작 아서는 그러한 메시지들이 음악과 춤으로 다가오는
정신분열의 괴로움과 고통에 신음하고,
그림자처럼 따라붙은 조커라는 대척점이자 연장선을 부정하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대중은 그 결과를 부정하고 조커라는 바이러스는 또 다시 군중들에게 스며드는것으로 마무리한다.
 
다만 이 영화가 명작의 반열에까지 오르지 못하는 아쉬움은
조커를 받아들이고 다시 분장을 한채로 법정에 올라가 농담을 던지던 아서가
왜 극의 후반에서 다시 아서로 회귀했는지, 그 심리묘사의 부재에 있다.
(아마도 그건 '리 퀸젤'에 대한 사랑에 있지 않을까 싶기는 한데..)
관객은 조커 분장의 아서를 보고 교도소에서 TV로 재판을 보는
동료 죄수들처럼 같이 환호했을 것이다.
그 환호가 일순간 침묵이 되었다.
아서는 조커가 되기를 거부했기 때문이다.
거부의 과정이 흐릿하게 그려졌기때문에 관중은 당황할 수 밖에 없는것이다.
이 부분에 대한 묘사를 좀 더 명확하게 했더라면
왜 사람들은 아서를 바라보지 않고 외면하는지에 대한 부끄러움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이 영화는 정확히 한 지점을 향해서 착실히 달려가고있다.
조커라는 지점을 향해서.
끝나지 않는 악의 굴레와 분노의 순환속에서.

영화에 대한 반응에 대한 반박

인터넷 여기저기에서 발견되는 영화에 대한 혹평에 대한 생각들.
 
노래를 왜 이렇게 많이 하는가. 틈만 나오면 나오는 노래가 지겹다.
> 이 영화는 뮤지컬영화라고 애초에 홍보했다.
   영화에 대한 사전정보가 부족했던것이 영화에 대한 혹평의 근거가 되지 못한다.
 
2편에서 히스 레저로 변하는 과정을 원했다.
> 당신이 원하는대로 영화가 흘러가지 않는다고 혹평의 근거가 되지 못한다.
   무엇보다 '히스 레저'는 이제 없고 '히스 레저의 조커'도 이제 없다.
   다크나이트 시리즈는 끝났다.
   '히스 레저의 조커'는 수 많은 조커 중 하나일 뿐이며,
   감독이 반드시 다크 나이트의 조커(당신이 원하는)를 연출해야하고
   피닉스가 그것을 연기해야할 의무는 1%도 없다.
   아마 이 영화가 다크나이트 시리즈의 스핀오프로 같은 세계관을 공유해야만 한다고
   굳게 믿고 있는 것 같은데 아무도 그렇게 말한적이 없다.
   영화의 방향성에 대한 자의적 해석은 혹평의 근거가 될 수 없다.
 
제목이 조커인데 조커를 전부 지워버렸다.
관객은 조커의 폭발하는 광기를 보러 간 것이다.
> 다시 말하지만 당신이 지웠다고 생각하는 그 조커,
   당신이 원하는 조커가 나오지 않는다고 혹평의 근거가 될 수 없다.
   그건 그냥 당신의 희망사항일뿐이다.
   조커의 광기에 사로잡힌 집단정신병적 광기의 산물일뿐이다.
   이 영화는 조커의 광기를 옹호하지 않는다.
   오히려 철저히 부정한다.
   애시당초 빌런이 빌런짓하는게 영화의 주 스토리가 되고,
   그것을 옹호하는 영화는 만들어질수가 없다.
   그 허무함과 악의 농도에 관해서 만들어진 영화도 많고 명작도 많지만
   어디까지나 그 끝은 악의 피폐함과 허무함으로 마무리된다.
 
뮤지컬 연출이 공유정신병적 장애와 배합되어 설득이 되지 않는다.
> 이건 맞는 말이라고 본다.
   뮤지컬이라는 형태가 영화적 장르의 한 갈래이고
   감독이 이것을 선택한것에는 딴지를 걸 수 없다.
   다만 그것이 관객들을 설득시키지 못했다면 패착이 있는 것이다.
   그런데 솔직히 나는 좋았다.
 
속편의 존재 자체가 말이 되지 않는다. 전작에서 깔끔한 마무리가 되었다.
>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전작에서 완성된 조커가 배트맨과 맞붙는 영화가 만들어졌다면,
   전작 조커의 탄생에 대한 배경설명이 완전해진다.
   하지만 이 영화는 조커의 탄생과 존재를 부정하고자 하는 영화다.
   감독의 방향성과 관객이 원하는 지점이 불일치해서 생기는 현상인데
   그것이 당신이 원하는대로 되지 않는다고해서 혹평의 근거가 되지는 못한다.
 
이 영화를 나는 좋게 보는 편이지만 그렇다고 명작으로까지 추켜세우지는 않는다.
다만 필요이상으로 엇나간 지점으로 혹평을 받는 현상이 잘 이해가 되지 않을뿐이다.

조커: 폴리 아 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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